[이래서 정권심판 ⑪] R&D 예산 ‘싹둑’…미래가 없어진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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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 : 대통령실은 사전 투표 첫날이었던 5일 홈페이지 ‘사실은 이렇습니다’ 코너에 다음 글을 올렸다. “R&D다운 R&D로의 개혁에 따른 2025년도 R&D 예산 증액은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밝혀온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R&D 지원방식의 개혁을 꾀하는 동시에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자 한다.” 지난 3일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이 총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한 것에 대해 ‘선거용’이란 비판이 나오자 거듭 해명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R&D 예산 증액을 강조하면 할수록 국민의 의구심을 커질 뿐이다. 올해 R&D 예산을 지난해보다 14.7%(4조 6000억 원) 삭감하고 나서 곧바로 내년엔 역대 최고 수준으로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오락가락 행보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R&D 예산을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렸다 해도 되는지도 의문이다.

윤 대통령 한마디에 33년 만에 삭감된 국가 R&D 예산

대통령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과학계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은 정부 정책 실패”라고 비판한다. 심지어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과 보수 성향 인사조차 이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단순히 ‘정책 실패’라는 말로 넘기기에는 그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국가 R&D 예산을 삭감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등 경제가 벼랑에 몰렸을 때도 R&D 예산을 조금이나마 늘려왔다. 국가 미래를 위해 연구개발 투자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드러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학마다 연구비가 줄면서 연구실을 떠나는 석·박사 학생들이 줄을 잇고 중소기업 R&D 사업도 중단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연구가 70~80% 진척된 사업도 올해 예산을 배정받지 못해 중단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수년간 공들인 탑들이 무너지는 과학기술 현장은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사태는 윤 대통령이 내뱉은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그는 지난해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변했다. 윤 대통령 발언이 나오자마자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도 비효율적인 R&D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의원은 과학계의 카르텔을 언급하며 과학자와 연구생들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R&D 예산 구조조정 필요성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과기정통부는 “역대 정부가 예산을 늘리기 쉬운 길을 걸어왔다면 윤석열 정부는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선도형 R&D로 나아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논평까지 내놓았다.

정부는 108개 사업을 통폐합하고 기초연구 예산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기초연구는 6% 이상 줄였고 출연연 예산은 10% 넘게 잘라냈다. 연구개발의 연속성을 위해 필요한 사업도 나눠먹기식, 관행적 추진, 유사 중복 사업 등 각종 꼬리표를 달아 예산을 줄이거나 없앴다. 문재인 정부 때 증액됐던 소재·부품·장비 분야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 폭이 특히 컸다.

과학계를 카르텔로 몰며 정부가 처음 발표한 올해 R&D 예산은 25조9000억 원으로 감속 폭이 16.6%에 달했다. 금액으로는 5조 2000억 원이었다. 과학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R&D 성과는 효율성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장기적으로 꾸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로 정부를 설득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즉흥적으로 예산을 줄이기보다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조차 “과학자가 특정 카르텔처럼 비추어지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쓰이면 현장과 소통하면서 합리적으로 조정해야지 일괄적으로 깎으면 혼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과학계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했다.

기초연구 중단되고 연구생 떠나고

올해 R&D 예산은 국회에서 논의 과정을 거치며 6000억 원이 복원됐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예산 삭감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서울대와 KAIST,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 주요 대학의 올해 R&D 예산이 2022년 대비 수백억 원씩 줄면서 연구생이 받는 연구비도 큰 폭으로 줄었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대학원생 학생연구원의 경제적 여건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며 “연구실마다 예산이 줄면서 연구생들이 생활고를 호소하고 박사후연구원의 권고사직도 늘고 있다”고 호소했다.

타격을 받은 곳은 대학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도 갑자기 끊긴 예산에 수년간 지속했던 연구개발 사업을 중단해야 할 상황이다. 정부가 올해 R&D 사업을 기존 51개에서 12개로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업 간 유사·중복, 단기 현안 등 비효율적 요소 개선을 위해 축소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R&D 예산으로 연구 현장의 혼란은 극심하다. 초기 단계는 그나마 타격이 덜 하지만 기초연구를 끝내고 실증단계에 들어선 사업은 기회비용이 막심하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 일반직으로 전환해 일자리를 구하는 연구원도 적지 않다.

과학기술계는 R&D 예산 삭감을 정부의 폭거로 규정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단체와 노동조합 등 9개 조직으로 구성된 국가과학기술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교수와 연구원,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 288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R&D 삭감이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이 91.9%, ‘바람직하지 않은 편이라는 대답’이 6.3%에 달했다. 거의 모든 응답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예산 삭감 이유를 정부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의사결정 구조가 불투명할 뿐 아니라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 모호하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R&D 예산 싹둑 자르고 원전은 묻지마 투자

정부는 지난 2월 22일 경남도청에서 윤 대통령 주재로 열린 ‘민생토론회’에 맞춰 원자력 발전(원전)에 대한 ‘통 큰’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원전 일감을 작년의 3조 원에서 3조 3000억 원으로 늘리고 특별금융도 1조 원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원전 기술 투자 세액공제를 최대 18%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특히 소형모듈 원자로(SMR) 개발에 지난해보다 9배가량 많은 6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했다.

기초과학 연구에 예산을 배정할 때 나눠먹기식은 아닌지, 중복되지는 않는지 꼼꼼하게 살피겠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카르텔은 과학계 전반보다 원전 분야가 더욱 강고하다. 문재인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전환을 탈원전으로 몰아 사실을 왜곡했던 세력도 ‘원전 카르텔’이었다. 늘어나는 전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원전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원전을 확대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다. 세계는 원전보다 태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기 위한 정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 국가적 위기가 닥쳐와도 R&D 분야 예산만큼은 늘려왔다.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사람과 기술에 대한 투자 없이 국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과학계를 범죄집단으로 몰아 R&D 예산을 싹둑 자른 정부는 없었다. 어떤 이유로든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