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숲속에 남겨진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악존)>는오프닝부터 기강을 세게 잡는다. 흔들림 없는 트래킹숏은 천천히 숲과 나무들을 지난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숲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뒷부분에 숲을 걷고 있는 하나의 숏이 붙지만 이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미끄러지듯 숲에 빠져든 뒤 시작하는 <악존>의 이야기 구조는 익숙하다. 순진한 마을 사람이 신비로운 산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 우화라기보다 차라리 전래동화에 가깝다.(*이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의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의 선택권을 넓힌다. 등장인물 중 누구의 입장에서 볼 것인지에 따라 영화를 다른 시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순진한 마을 사람 타카하시인가, 신비한 산의 수호자 타쿠미인가. 두 사람은 곧 더 넓은 의미로 치환되기도 한다. 끝없는 개발을 요구하는 도시의 삶에 치인 샐러리맨인가,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원주민인가. 도시인은 행동보다 서류와 발표 자료인 언어로, 원주민은 말보다 자연과 합일된 생활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운다.

하지만 <악존>을 단순히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고 도식화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그게 과연 합당한 결정인가 하는 점이다. 도시인이 자연에서 지켜야 할 금기를 어겼는가? 아니다. 오히려 원주민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며 이주를 꿈꾸기도 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원주민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가? 아니다. 이주 3세대라고 거창하게 소개하지만 그래봐야 100년 남짓이다. 숲을 따라 도로를 내고 건물을 짓고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쓴다. 균형이 중요하다지만 누구의 기준을 따른 균형인가.

ai 투자 : 자연이 묻는 도시인과 원주민의 차이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보자. 자연이 바라보는 도시인과 원주민의 차이는 무엇인가. 누가 나무를 베어내고 도로를 내며 숲을 더 파괴하는가, 누가 건물을 지어 강을 오염시키는가. 기후 위기에 따라오는 농담 같은 말이 있다. 지구가 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망하는 거다. 지표면에서 인류가 번성한 인류세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인간의 존재와 특정한 행동이 자연이라는 어마어마한 범위에서 끼치는 영향은 사실 ‘없다’고 말할 정도로 미미하다고도 볼 수 있다. 지구의 천문학적 시간 앞에서는 고사리나 공룡이나 인간이나 한철이다.

가치판단을 하기에 미약한 존재인 인간을 바라보는 자연의 무미건조한 시선은 카메라에 담겨있다. <악존>은 카메라가 인물을 찍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있는 장소에 인물이 들어와 행동한다. 타쿠미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썰어 땔감을 준비하고, 우동집에 전달할 냇물을 길어내는 장면은 의아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영화를 보는 인간의 호기심은 충분히 채워지고도 남아 자연의 무관심에 지칠 무렵 카메라의 시선이 겨우 바뀐다. 이뿐만 아니다. 땅에서 자란 땅와사비의 시선에서 인물을 보기도 하고 심지어 무생물인 자동차에 카메라가 설치됐다는 인공적인 존재감이 강조되기도 한다.

카메라의 시선뿐 아니다. 연출 또한 관객의 집중을 방해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 상황이 마무리 되지 않고 갑자기 분절되는 숏. 거기에 따라 허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배경음악. 타쿠미와 타카하시, 원주민과 도시인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건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소격효과들이다. <악존>에서 인물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이라는 배경은 결국 ‘악’이란 무엇인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묻는 궁극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후반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야 할 하나가 실종된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산, 위태롭게 흔들리는 손전등의 불빛, 애타게 하나를 찾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 피 묻은 가시나무. 자연스러웠던 지금까지와 달리 불안함을 조성하는 인위적인 숏들의 연결 이후 무방비 상태에서 강렬한 폭력이 터져 나온다. 익스트림롱숏으로 멀찌감치 잡아서일까. 최소한 살인미수에 다다르는 악의 등장이 어쩐지 너무 고요하다. 타쿠미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타카하시가 목숨을 잃는 건 어쩐지 ‘자연’스럽다. ‘악’의 현현이 차곡차곡 조짐을 쌓아온 탓이다.

사슴이 지나는 길목에 글램핑장을 짓겠다는 타카하시. 타쿠미는 그럼 사슴은 어디에 가느냐 묻고 타카하시는 어디든 가겠죠라고 성의 없이 대답한다. 글램핑장 건설의 최고 화두는 정화조다. 타카하시가 제안한 위치와 용량이라면 하류의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없다. 마침 폭력이 터지는 곳은 사슴이 물을 마시러 오는 호숫가이다. 타쿠미는 또 하나의 힌트를 준다. 겁이 많은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는 드문 순간은 상처를 입거나 새끼 사슴이 있을 때라고. 사슴은 공격받아 피를 흘리고 있고 하나는 코피를 흘린다.

엔딩은 오프닝의 반복이다. 어두워진 숲길. 어떤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인지, 숲이 나를 지켜보는지 모를 트래킹숏이 길게 이어진다. 다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함께 들린다. 엔딩숏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지만 숲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리를 전래동화에 세계에 가둬놓은 것처럼. 악이 무엇인지 판단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시간. 관객은 의문을 품은 채 숲속에 남겨진다.

카지노 : 무심한 자연 앞에 선 인간

성경의 ‘욥기’에서 의로운 인물인 욥은 아들, 딸이 폭풍우에 희생된 것을 비롯해 엄청난 고통과 수난을 겪는다. 욥이 가족을 잃고 통곡할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말도 못 할 죄를 지었는지 떠올리라며 윽박지른다. 사실은 신이 사탄에게 욥의 믿음이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려 는 것도 아니다.

욥의 이야기처럼 <악존>은 분명 무정한 자연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가득하다. 신의 섭리나 우주의 질서로 말할 수도 있을, 가치판단이 없는 무심한 자연현상에도 인간은 쉽게 무릎을 꿇는다. 허나 그리 설계됐다 하여 자연의 섭리에 굴복할 수만은 없다. 무심한 빗방울에도 특별한 의미를 불어넣도록 인간이 설계된 탓이다. <악존>에는 넓지는 않으나 의지할 만한 인간의 영역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법칙 아래에 있지만 인간들은 상류에 있는 사람이 하류의 사람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도덕률의 베이스캠프를 조그맣게 꾸린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새롭게 발생한 움직임은 곧 원래의 균형이 깨어짐을 의미한다”며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상황에서 무언가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인생이란 가끔 그런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균형이 깨지는 건 자연의 일이지만 깨진 균형을 맞추는 건 인간의 몫이다. 섭리와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악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인간은 항상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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