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아름다움은 무죄일까? [역사의 뒤 페이지]

ai 투자 : 1936년 8월9일 밤, 서울 광화문통, 종로 대창양화점 앞, 중학동 일대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신문사의 본사나 속보소들이 있는 곳이었다. 신문사 스피커에서는 NHK 아나운서 야마모토의 흥분된 목소리가 울렸다. 밤 11시2분, 드디어 “탕” 하는 출발 신호가 들렸다. 라디오 속 10만 관중의 함성과 조선인 군중의 함성이 뒤섞였다. “손기정!” “남승룡!” 뜨거운 응원 소리가 한여름의 밤하늘을 더욱 덥혔다.

재원 : 8월1일에 개막한 베를린올림픽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가슴 뛰는 이벤트였다.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선인 7명이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 나선 손기정(1912~2002)과 남승룡(1912~2001)은 관심의 초점이었다. 특히 손기정은 1935년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신궁 대회에서 2시간26분, 비공인 세계 최고기록을 세운 우승 후보였다.

선두 그룹이 17㎞ 지점을 지나던 자정, 갑자기 중계가 끊겼다. 예고된 중단이었다. 그해 올림픽에서 NHK는 밤 11시, 아침 6시 반 하루 두 번만 실황을 중계했다. NHK를 받아 송출하는 경성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여섯 시 반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집으로, 대폿집으로 흩어졌다.

방송은 끊겨도 신문은 쉬지 않았다. 베를린과 계속 통화를 했다. 손기정이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새벽 1시께 다시 광화문에 사람이 모였다. 인파가 운집했다. 마침내 새벽 2시께, 〈동아일보〉 사옥 2층 창으로 여자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손기정 선수가 일착으로 골인해 우승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멍했다가 곧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만세, 만세, 손기정 군 만세!” 잠시 후 제2보가 전해졌다. “손기정 군이 2시간29분12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남승룡 군도 3위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손기정 만세” “남승룡 만세”는 어느새 “조선 만세”로 바뀌고 있었다. 온 조선이 함께 환호하고 울었다(천정환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에서 재구성).

손기정의 우승은 모든 조선인의 감격이었다. 조선인도 일본인이나 서양인 못지않게 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문화연구자 천정환의 말처럼 윤치호·여운형·한용운·이광수·서춘·유익한·심훈·김교신·함석헌·이상처럼 전혀 다른 사상을 가졌던 동시대 인물 전부의 의견 일치였다. 하지만 손기정은 일본 대표였다. 영광의 이면에 울분이 있었다. 손기정 자신도 그랬다. 사진 속 그는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숙인 채 한없이 침울하다. 들고 있던 참나무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1983)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한 번도 일본을 위해 뛰어본 적이 없다. 나와 내 나라 조선을 위해 뛰었을 뿐이다.”

울분을 품고 뛰었을 손기정의 레이스를 복기해보자. 출발 신호가 울리고 트랙 한 바퀴를 돈 다음 스타디움을 빠져나갈 즈음 손기정은 당황한다. ‘이건 마라톤이 아닌가. 무언가 잘못됐어.’ 선수들의 페이스가 너무 빨랐다. 4년 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가 미친 듯한 속도로 앞서 나갔다. 손기정은 페이스를 지키려 했지만 못 따라잡을까 조바심도 났다. 10㎞ 지점에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와 만나 동반 레이스를 펼쳤다. 손기정이 앞지르려 하자 하퍼가 외쳤다. “슬로! 슬로!” 처음 본 사이인데 하퍼는 손기정의 오버 페이스를 염려했다. 손기정은 알았다며 손을 들어 보인 다음, ‘그래도 빨리 가야지’ 하며 하퍼에게 선두 그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30℃가 넘는 날씨였다. 결국 30㎞ 지점을 넘기며 자발라가 쓰러졌다. 끝까지 페이스를 지킨 손기정은 막판에 100m 달리기 수준으로 질주하며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마라톤 첫 완주였던 하퍼가 2위를 차지했다.손기정의 친구이자 나치의 협력자

하퍼와 손기정이 서로 독려하는 저 아름다운 장면이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 제1부 ‘민족의 제전’ 러닝타임 1시간43분에 나온다. 12분30초 정도인 마라톤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손기정을 담은 장면들은 물론 남승룡을 클로즈업한 슬로모션 장면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유명한 마라톤 장면이 담긴 영화 〈올림피아〉는 독일의 전설적인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의 대표작 중 하나다. 리펜슈탈에게도 손기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폐막 후에 손기정과 삼단뛰기 우승자인 다지마 나오토를 집으로 초대했다. 손기정의 기억에 따르면, “덕수궁에 비할 만큼 엄청난 호화 주택이었다”. 손기정과 리펜슈탈은 1956년 독일에서 열린 국제군인마라톤대회와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재회한다. 편지를 교환하며 평생 친구로 지냈다.

레니 리펜슈탈은 20세기 영화사를 넘어 문화사의 논란 한가운데 선 인물이다. 그녀는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와 나치의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로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다. 동시에 파시즘의 적극 협력자, 심지어 ‘나치의 핀업걸’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끝없는 도전과 성취.’ 리펜슈탈의 삶을 이처럼 잘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10대 시절,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을 공부한 끝에 결국 지지를 얻어내고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바로 배우로 전향, 산악영화 장르를 개척한 아르놀트 팡크 감독 아래에서 배우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누군가의 페르소나로 남기에 그녀는 재능도 야심도 너무 컸다. 1932년, 갓 서른 살에 산악영화 〈푸른빛〉으로 주연 겸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받은 히틀러가 1933년 집권 후 나치당의 선전영화 제작을 그녀에게 맡긴다. 〈신념의 승리〉(1933), 〈의지의 승리〉(1934),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1935) 등 이른바 ‘파시스트 3연작’이 모두 그녀의 작품이다. 특히 나치당의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문법을 새로 썼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녀의 명성은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 제1부 ‘민족의 제전’, 제2부 ‘미의 제전’(1938)으로 정점에 올랐다. 올림픽 소식 모음 정도로 여겨지던 기록영화가 그녀의 지휘 아래 예술이 됐다. 하지만 베를린올림픽은 나치의 노골적인 선전장이기도 했다. 예술과 선전이 영화 속에서 뒤섞였다.

리펜슈탈은 패전 후 체포를 피할 수 없었다. 네 차례 전범재판을 거쳐 나치의 ‘동조자’이지만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은 없다며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다. 다시 영화를 만들고자 애쓰지만 전력 탓에 계속 실패한다. 1962년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고립 생활을 하던 누바족을 접촉하고 촬영을 시작한다. 문명의 확산 속에 사라져가는 ‘고귀한 야만인’을 담은 그녀의 사진들이 다시 세상에 충격을 줬다. 사진집 〈최후의 누바족〉(1974), 〈카우 사람들〉(1976), 〈레니 리펜슈탈의 아프리카〉(1982) 등으로 또 한번 명성을 떨쳤다. 이후 수중촬영에 심취해서 71세에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획득하고 90대 후반까지 다이빙을 했다. 100세가 되던 2002년, 수중촬영 장면을 모아 다큐멘터리 영화 〈물 아래의 인상〉을 발표하고, 40년간 함께한 마흔 살 연하의 조수 호르스트 케트너와 결혼했다. 이듬해 101세로 사망했다.

레니 리펜슈탈의 삶과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혹시 여성이라서 과도하게 비판받은 건 아닐까? 수많은 나치 전력자들이 1950년대를 거치며 공직과 사회생활에 복귀했음을 감안하면 나치당에 가입한 적도 없는 그녀를 향한 비난은 과한 것 같기도 하다. 평전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1996)을 쓴 오드리 설킬드는 말한다. “리펜슈탈은 남자의 세계에 살면서 남자들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했지만, 동시에 여자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았다.” 그녀는 언제든 중간 단계 없이 히틀러를 만나 무한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아니, 남자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후일 에바 브라운과의 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가 히틀러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무지한 아름다움’은 무죄인가

리펜슈탈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미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태그(1933~2004)에게서 나왔다. 〈최후의 누바족〉에 대한 서평 ‘매혹적인 파시즘’(1974)에서 손태그는이 사진집을 그녀 생애 전반에 걸친 ‘파시즘 미학’의 연속으로 파악한다. 위대한 인간들이 의지와 생명력을 증명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산악영화로 출발하여, 충성과 복종, 규율의 완벽한 교차를 보여주는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를 거쳐, 벌거벗은 원주민들의 영웅적 공동체를 그리는 〈최후의 누바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늘 강한 육체에 대한 미학적 집착이, 공동체의 황홀경을 통한 소외의 해소라는 갈망이 있다. 손태그는파시즘이 단지 잔인한 공포정치만이 아니라 이런 미학적 이상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그 이상에 대한 갈망이 파시즘의 종말 이후에도 살아 있다고 경고한다.

서평을 접한 리펜슈탈의 반응은 이랬다. “그처럼 지적인 여자가 그토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신기할 뿐이다.” 독일의 영화이론가 토마스 엘세서는 리펜슈탈 편에 섰다. 그녀가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에 몰두하게 된 것은 파시즘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을 보는 무용가적 시선 때문이었으며, “육체를 종합적인 표현 수단으로 보는 것은 그녀의 일생 내내 일관적인 자세였다”라고. 손태그와엘세서의 해석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아무튼 그녀의 영화들이 나치의 선전영화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도 히틀러에게 심취했고 파시즘에 우호적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묻는다. 자신이 나치 선전영화를 만들던 1930년대 중반에 나치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대학살을 저지르리라고 예견할 수 있었겠느냐고. 평전 작가는 저명한 히틀러 연구자 요아힘 페스트의 말을 인용한다. “히틀러가 만약 1938년 말쯤에 사고나 암살로 사망했다면 그를 독일 역사의 위대한 인물, 독일의 가장 뛰어난 정치인으로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리펜슈탈의 자기변호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들이 나치에 대한 지지를 더욱 높이는 데 기여했다면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배우 시절 리펜슈탈의 최대 라이벌은 마를레네 디트리히(1901~1992)였다. 리펜슈탈이 놓친 배역 중 가장 큰 역할은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작품 〈푸른 천사〉의 여주인공인 롤라-롤라였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에게 배역이 돌아가자 그녀는 크게 낙담하고, 디트리히를 개인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슈테른베르크를 통해 할리우드 진출 제의가 왔을 때 디트리히는 응했고 리펜슈탈은 거절했다. 영화 촬영을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36년 무렵, 디트리히에게 나치가 접근했다.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독일 귀환을 요청했다. 사실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배우였다. 그녀는 제안을 거절하고 1937년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다. 같은 해 〈갑옷 없는 기사〉 출연료 전액인 45만 달러를 독일 유대인의 탈출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리펜슈탈이 나치를 위해 영화를 만들 때 디트리히는 나치에 맞섰다.

레니 리펜슈탈은 야심에 가득찬, 한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따분한 어른들의 사정”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후에 그녀는 강제수용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누차 심문받았다. 그녀는 수용소의 존재와 유대인 억류를 알았지만 그렇게 잔혹한 곳인지는 몰랐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독일인이 그렇게 답했다. 총통과 극도로 가까웠던 그녀의 대답도 같았다.

진위를 따지지 말고 그녀의 무지를 인정해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최후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홀로코스트 문학의 정점이 된 수기 〈이것이 인간인가〉(1945)의 1976년판 부록에서 제기된 의문들에 답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인한 일들을 세세히 알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고의로 획득한 무지 위에 서 있는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토록 황홀하고 끔찍한 인간 앞에서 묻고 또 묻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기자명조형근 (동네 사회학자)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손기정#레니 리펜슈탈#파시즘#올림피아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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